출생 전 부모의 이혼으로 덴마크 출신의 어머니가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남. 친아버지가 유대인 출신의 주식 중매인인 발데마르 이시도르 살로몬센[Waldemar Isidor Salomonsen]였기에 에릭 에릭슨의 출생 신고 시 이름은 '에릭 살로몬센'으로 등록되었고 친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어머니 카를라 아브라함[arla Abrahamsen]은 코펜하겐의 유명한 유대인 가족 출신이다. 카를라의 어머니인 헨리에타[Henrietta]는 카를라가 13살 때 사망, 아버지 요세프[Josef]는 말린 상품을 파는 상인이었다. 카를라의 오빠들인 니콜라이, 에이나르, 악셀은 지역 유대인 자선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러시아에서 온 궁핍한 유대인 이민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었다. 에릭 에릭슨이 태어난 후 어머니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카를스루에로 이주했는데, 1904년 유대인 소아과 의사인 테오도어 홈부르거[Theodor Homburger]와의 재혼으로 이름이 '에릭 홈부르거'가 되었다. 에릭슨의 어머니는 철학과 문학,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에릭 홈부르거 에릭슨[덴마크어: Erik Homburger Erikson]은 덴마크계 독일인으로 미국에 활동한 발달심리학자이자 아동 정신분석학자이다. 인간의 사회성 발달 이론으로 유명하고 '정체감 위기'(Identity Crisis)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주요 업적은 인간의 전 생애에 걸친 발달 심리학(life span developmental psychology)을 다룬 것이다. 복잡한 출생 배경과 불우한 성장환경으로 인해 평생에 걸쳐서 자아 정체감에 관해 관심을 가졌고 심리학자가 되어 이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였다. 자아 정체감 발달은 에릭 에릭슨의 삶과 이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으로 인식된다. 어린 시절과 성년기 초기의 이름은 '에릭 홈부르거'였으며, 부모는 에릭 에릭슨의 출생에 관한 자세한 사항을 비밀로 하였다.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지역사회로부터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고, 친부모로부터 덴마크 혈통을 물려받아 푸른 눈을 가진 금발로 북유럽인의 외모를 가졌기에 유대인 학교에서는 노르만인이라며 놀림을 당했다. 집안에서는 양자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고, 이렇게 출신배경과 성장환경은 지속해서 그를 괴롭혔고 정체성에 대한 심한 혼란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는 초등학교를 수학하고 18세에 김나지움을 졸업한 것이 최종 학력이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했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유럽을 여행하면서 방랑과 방황을 하였다. 한때 미술가가 되기 위해 고전미술 공부에도 전념하였지만 곧 포기하였고, 방황기 피렌체에서 만난 아동 정신분석학자 페이스 블로스의 추천으로 칼스루에에서 학교 운영을 도왔다. 빈의 사립학교에서 근무하던 중에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 덕분에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안나 프로이트의 소개로 빈 정신분석 연구소에 들어간 후, 에드워드 비브링[Edward Bibring], 하인츠 하트만[Heinz Hartman],헬레네 도이치[Helene Deutsch] 등 유수의 정신분석가의 지도 아래 정신분석 훈련을 받은 그는 1933년 마침내 정신분석가가 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혁신적 교육기관인 몬테소리의 학위도 취득했다. 1933년 빈 정신분석 연구소를 졸업한 이후,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기 시작하자, 아내와 함께 덴마크로 간 뒤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보스턴에서 아동 정신분석학자가 되었다. 매사추세츠 일반병[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과 저지 베이커 가이던스 센터[Judge Baker Guidance Center] 하버드 의학대학원과 정신과 병원에서 일하면서 우수한 임상 의학자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고, 1936년 예일 대학교에 들어가 인간관계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의학대학원에서 강의했다. 아동 분석가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예일대학에 파트타임 교수로 채용되었다. 사우스다코타주의 수족[Sioux] 거주지에서 몇 년간 아이들을 관찰한 뒤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교수가 되어 아동복지 연구소에 가입하고 의사로서의 개인영업도 시작하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에릭슨은 유록족[Yurok] 인디언의 어린이들을 연구하였다. 에릭슨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아동기와 사회(Childhood and Society)를 출판한 이후인 1950년, 충성 선서[loyalty oaths]에 서명하도록 요구한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떠났다. 10년간 매사추세츠주의 Stockbridge에 있는 정신의학 치료시설인 Austen Riggs Center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여기서 감정적인 문제를 가진 젊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였다. 1960년대에 에릭슨은 하버드 대학교의 인간개발학 교수로 돌아온 뒤에 1970년 은퇴할 때까지 하버드 대학교에 남았다.. 교수로 채용되면서 이전까지 사용하던 홈부르거[Homburger]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성을 에릭슨[Erikson]으로 고쳤으며 미국 시민권도 취득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과정에서도 본인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인다. 생부와 계부의 흔적을 이름에서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을 바꾸니 가장 좋아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에릭슨의 세 아이들이었는데 이들은 학교에서 햄버거[Hamburger]라는 별명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더 이상 햄버거라고 불리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했다. 에릭슨이 성을 바꾼 여러 원인 중 하나가 사실 아이들 때문이었다. 자신의 계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중간이름[middle name]을 Homburger로 표기하였고, Erikson이라는 이름은 자신에게 Erik이라는 이름을 준 자신의 생부를 기리기 위해 Erik이라는 이름 뒤에 아들[son]을 덧붙였다. 예전 유럽인들에게는 성은 귀족들만 가지는 것이었고 평민들은 딱히 성이 없었고 다만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아버지의 이름 뒤에 son(혹은 이와 비슷한 각 나라의 용어들 'sen' 등)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Williamson, Anderson, Peterson 등등] Erik도 그와 비슷하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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